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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Korean Association of Slavic Languages
한국 슬라브어학회

슬라브어 연구 창간사

우리나라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역사의 미묘한 현실 속에서 우리 노어노문학계는 최근 몇 년 동안에 양적으로 엄청난 변화를 겪어왔습니다. 급박하게 전개되는 국제 정세의 변화는 러시아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크게 고조시켜, 이제 러시아어를 가르치는 대학도 무려 30여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지난 10년간의 이러한 괄목할만한 양적 성장은 우리 노어학계를 위해서는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양적 팽창의 급격한 흐름을 조용히 가라앉히고, 러시아 전반에 관한 학술적인 접근을 체계적이고도 심도있게 정립해야 할 시점에 서 있습니다. 이것은 우선 국내 러시아학 전공자들의 끊임없는 연구와 냉철한 현실 인식에 기반을 둔 철저한 자기 반성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동안 우리는 외국과 비교하여 훨씬 뒤쳐진 러시아학 연구를 너무도 쉽게 우리가 처한 시대 상황과 결부시켜 자기합리화하는 데에만 급급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그러나 무한 경쟁으로 치닫고 있는 이 시대의 학문적 조류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동안 안주해온 ‘짧은 연륜’이라는 변명의 틀을 과감히 벗어 던지고 국제적 학술 분야에서도 당당한 한 경쟁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연구 대상은 러시아학이 아닌, 보다 넓은 의미를 지닌 슬라브학이어야 한다는 것도 새롭게 인식해야 할 시점인 것 같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서 볼 때, 이제 우리는 양적인 성장을 뛰어넘어 질적인 발전을 추구해야 할 단계에 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슬라브학계의 질적인 도약은 무엇보다도 먼저 각 분야별 전문적인 학술지의 출현이 없이는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이러한 공통 인식을 바탕으로 그동안 연구 모임을 가졌던 어학 전공자들이 국내 슬라브어학계를 좀 더 활성화하고, 세계 슬라브학계에서 차지하는 우리의 위상을 제고하기 위하여 어학 전문 학술지 『슬라브어 연구』를 창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최근 세계화의 풍랑 속에서 우리 삶의 많은 부분들이 크고 작은 영향을 받고있으며, 우리 대학 사회도 예외는 아니어서 우리가 굽이치는 역사의 한 가운데 서 있다는 사실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위기 상황에서 ‘내’가 살아 남기 위해서는 ‘남’을 이겨야 한다는 경쟁 의식이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하나의 사회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개개인이 아닌, ‘우리’라는 공동의 이름이 필요합니다.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에 바탕을 둔, 개개인의 사고와 행동 하나 하나가 바로 우리 시대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새로운 열정을 가지고 건강하고, 비판적이며, 앞서가는 사고로 함께미래라는 공간을 향해 걸어갈 때, 우리는 역사 위에 우리의 존재 의미를 새겨넣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처한 학문적 시련을 지혜롭게 헤쳐나가기 위해 우리 모두 머리를 맞대고 많은 고민의 시간을 함께 가지도록해야 하겠습니다. 그러한 뜻에서 우리 『슬라브어 연구』가 명실상부한 하나의 학술지로 자리매김을 하면서, 국내 슬라브어학도들의 지적 고뇌와 앞서가는 시대 정신을 대변하는, 학술적 토론을 위한 우리 모두의 공동의 장으로 우뚝 섰으면 합니다.

다가오는 21세기를 뛰어 넘어, 맥맥히 이어질 하나의 새로운 시작으로서, 『슬라브어 연구』가 세계 슬라브학계의 역사 속에 의미있는 하나의 몸짓으로 남기를 기대합니다.

1996년 6월
조 남 신